영등포역 알림판에 붙은 ‘난곡동 할매께’, 48년 전 차비 500원이 500만 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영등포역 알림판에 붙은 ‘난곡동 할매께’, 48년 전 차비 500원이 500만 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전부터 커뮤니티 여기저기에 사진 한 장이 돌고 있어요. 서울 영등포역 알림판입니다. 평소 같으면 열차 운행 안내나 공지가 붙을 자리예요. 거기에 ‘난곡동 할매께’라는 제목의 편지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습니다. 디시인사이드 실시간베스트에는 「영등포역에 붙은 낭만적인 알림판」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조회 1만 2천 회, 추천 72개가 붙었습니다.

근데 저는 처음에 지어낸 이야기인 줄 알았거든요. 확인해 보니 아니었어요. 한국철도공사가 확인해 준 사연입니다. 9월 14일에 머니투데이·한국일보를 비롯한 여러 매체가 같은 내용을 보도했어요. 다만 커뮤니티에는 사진만 돌아서 무슨 일이 언제 있었는지가 뒤섞여 있습니다. 날짜부터 순서대로 정리해 볼게요.

디시인사이드 실시간베스트에 올라온 정리 글. (커뮤니티 캡처)
디시인사이드 실시간베스트에 올라온 정리 글. (커뮤니티 캡처)

사실 확인

머니투데이가 9월 14일 보도한 내용부터요. 한국철도공사 수도권 서부본부에 따르면 80대 여성 A씨가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역을 찾아왔습니다. 손에는 현금 500만 원이 든 봉투와 자필 편지가 있었어요. 위키트리는 시각을 오전 11시쯤으로 전했습니다. 봉투 안은 5만 원권 100장이었다고 하고요.

할머니가 남긴 손편지. (한국철도공사 제공, 머니투데이 게재)
할머니가 남긴 손편지. (한국철도공사 제공, 머니투데이 게재)

편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는 아주 오래된 빚을 갚으려 합니다.” 그 빚이 생긴 건 1978년 10월이에요. A씨는 그때 초등학생이던 아들과 함께 전북 정읍에서 완행열차를 탔습니다. 그렇게 영등포역에 도착했어요. 형편이 어려워 자기 표만 겨우 샀고, 아이 표는 사지 못했습니다.

편지 앞부분.
편지 앞부분. “저는 아주 오래된 빚을 이제야 갚으려 합니다”로 시작한다. (커뮤니티 캡처)

개찰구에서 역장이 아들 차비로 500원을 달라고 했어요. 근데 모자에게 남은 건 토큰 한 개가 전부였습니다. 편지에 적힌 ‘토큰 한 개’가 그날 수중에 있던 전부였던 거예요. A씨가 사정을 털어놓자 역장은 돈을 받지 않고 두 사람을 그냥 보내줬습니다. 편지에는 그 순간이 이렇게 적혀 있어요. “역장님께 사정을 했더니 고맙게도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절을 하고 돌아서며 이 돈은 내가 죽기 전에 갚겠다고 다짐을 했지요.”

편지 끝부분. 이름 대신 '난곡동 할매 올림'이라고만 적혀 있다. (커뮤니티 캡처)
편지 끝부분. 이름 대신 ‘난곡동 할매 올림’이라고만 적혀 있다. (커뮤니티 캡처)

그리고 48년이 지났습니다. A씨는 “지금은 많이 늦었지만, 그리고 많이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받아달라”고 썼어요. “그동안 많이 고맙고 감사했다”는 말도요. 편지 끝에는 이름 대신 ‘난곡동 할매’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옛 영등포역 모습. 한국일보 기사에 함께 실린 자료사진이다.
옛 영등포역 모습. 한국일보 기사에 함께 실린 자료사진이다.

왜 하필 지금이었나

48년을 미룬 게 아니었어요. 더 미룰 수 없게 된 쪽에 가깝습니다. 머니투데이는 A씨가 투병 중이던 아들을 먼저 떠나보냈다고 썼어요. 더 늦기 전에 마음의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해 편지와 현금을 마련했다는 겁니다.

위키트리도 아들을 암으로 보내고 나서 역을 다시 찾았다고 전했어요. 500원을 대신 내주지 못했던 그 아이가 먼저 떠난 거예요.

1978년 상황을 재연한 장면. 채널A가 화면에 'AI 제작 영상'이라고 표시했다. (방송 캡처)
1978년 상황을 재연한 장면. 채널A가 화면에 ‘AI 제작 영상’이라고 표시했다. (방송 캡처)

역 직원들한테는 난감한 돈이었습니다. 48년 전 그 역장이 누구인지 알 방법이 없어요. 돈을 받을 담당자도 없고요. 위키트리에 따르면 직원들은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혔어요. 근데 할머니의 뜻을 꺾지 못했고, 그대로 봉투를 받아 들었습니다. 머니투데이는 서부본부가 이 돈을 기타수익으로 처리한 뒤 사용 방안을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어요. 누가 나눠 갖는 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 가지 짚어둘 게 있어요. 커뮤니티에 같이 도는 캡처 중에 1978년 그날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건 실제 기록 화면이 아니에요. 채널A가 사연을 전하며 만든 재연 영상입니다. 화면 왼쪽에 ‘AI 제작 영상’이라고 표시돼 있어요. 편지와 알림판은 실물 사진입니다. 근데 그 장면들은 재연이에요. 구분해서 보시는 게 맞습니다.

편지 속 문장을 자막으로 옮긴 장면. 이 역시 재연 영상이다. (방송 캡처)
편지 속 문장을 자막으로 옮긴 장면. 이 역시 재연 영상이다. (방송 캡처)

직원들이 붙인 답장

영등포역 직원들은 지난 13일 역사 안 알림판에 답장을 붙였습니다. 제목이 ‘난곡동 할매께’예요. 위키트리는 그 자리가 KTX 개찰구 앞, 평소라면 열차 운행 안내가 걸리는 자리라고 전했습니다.

이승연 영등포역 역무팀장 인터뷰. (방송 캡처)
이승연 영등포역 역무팀장 인터뷰. (방송 캡처)

직원들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날 어머니께서 영등포역에 건네주신 용기와 따뜻한 마음, 그리고 큰 감동 덕분에 매일을 선물처럼 보내고 있습니다.” 이어 “누군가에게 받은 배려와 친절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라고 적었어요.

“무엇보다 저희가 역무원으로서 고객 한 분 한 분께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지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채널A 보도에서 이승연 영등포역 역무팀장은 할머니가 “자꾸 사과를 하시더라”고 전했습니다. “내가 그 옛날에 벌써 갚았어야 되는 돈인데 미안합니다”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돈을 주러 온 사람이 사과를 하고 간 셈입니다.

직원들이 붙인 답장의 마지막 줄.
직원들이 붙인 답장의 마지막 줄.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커뮤니티 캡처)

답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부디 언제든 영등포역에 찾아와 주세요. 저희는 따뜻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커뮤니티 반응도 비슷했어요. 위키트리가 모은 댓글은 이런 식입니다. “늙었나 보다 이런 거 보면 눈시울이 시큰해.” “세상은 아직 살기 좋구나.” “아…진짜 이거 좋다… 낭만적이네 정말. 편지 읽는데 눈물이 핑 도네.”

위키트리는 9월 14일 에펨코리아 등 커뮤니티에 알림판 사진이 올라오면서 사연이 퍼졌다고 전했어요. 디시 실시간베스트에 올라온 건 그 뒤였고요.

저는 마지막 줄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48년 전 그 역장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한 건지 몰랐을 거예요. 표 한 장 값을 받지 않은 것뿐입니다. 근데 그게 한 사람 마음에 48년을 남았어요. 이번엔 지금 일하는 직원들이 그걸 다시 받아 적었고요. 여러분은 이 편지에서 어느 줄이 제일 오래 남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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