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8월, 보스턴의 한 컨벤션 홀. 무대에 선 스티브 잡스 뒤로 거대한 화면이 켜졌는데, 거기 뜬 얼굴이 하필 빌 게이츠였다.
객석에서 야유가 터졌다. 진짜로 “우~” 하는 소리가 그대로 녹음돼 남아 있다. 애플 팬들 입장에선 원수 같은 회사 사장이 갑자기 화면에 뜬 거니까.
근데 그 야유를 뒤집어쓰면서 발표된 내용이, 사실은 애플을 살린 거였다는 게 지금 보면 좀 웃프다.

통장에 90일치가 남아 있었다
그때 애플 상태가 어땠냐면, 남은 현금이 90일치였다. 90일. 세 달이다. 세 달 뒤에 돈이 안 들어오면 그냥 문 닫는 거였다.
지금 시가총액 몇천조 원짜리 회사 얘기 맞나 싶은데, 그때는 진짜 그랬다. 제품 라인은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꼬여 있었고, CEO는 계속 갈렸고, 맥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주던 개발사들이 하나씩 손을 뗐다.
잡스도 원래 그 자리에 없던 사람이다. 1985년에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났고, 나가서 넥스트(NeXT)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러다 1996년 말에 애플이 그 넥스트를 인수하면서 잡스가 딸려 들어온 거다.
그리고 1997년, 당시 CEO였던 길 아멜리오가 밀려나면서 잡스가 임시 CEO 자리에 앉는다. 돌아와 보니 회사에 90일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원수한테 돈을 받는다는 것
여기서 등장하는 게 마이크로소프트다. 1억 5천만 달러어치 애플 주식을 사겠다고 나섰다.
조건이 붙었다. 서로 걸어놓은 소송을 전부 취하하고, 특허는 상호 사용하기로 하고,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계속 공급하고,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맥 기본 브라우저로 넣는다.
애플 팬들이 화난 포인트는 사실 돈이 아니라 이거였다. “우리가 저 회사 브라우저를 기본으로 쓴다고?”
근데 애플 입장에서는 돈보다 오피스가 더 급했다는 얘기가 많다. 그때 맥에서 워드랑 엑셀이 안 돌아가면 회사에서 맥을 살 이유가 아예 없어지는 거였으니까.

마이크로소프트 쪽 사정도 있었다. 그 시절 마이크로소프트는 독점 문제로 정부한테 탈탈 털리는 중이었다. 경쟁사가 죽어버리면 “봐라, 시장에 우리밖에 없지 않냐”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순수한 미담이라기보다는, 서로 필요한 게 맞아떨어진 거래에 가까웠다는 해석이 더 많다.
야유 속에서 잡스가 한 말
발표 끝나고 잡스가 화면 속 게이츠한테 이렇게 말한다.
“빌, 고맙습니다.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됐어요.”
객석이 야유하는 와중에 나온 말이다.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저 말을 했다는 게, 그때 애플이 얼마나 급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듬해 1998년, 반투명 파란색 껍데기를 뒤집어쓴 아이맥 G3가 나온다. 컴퓨터가 베이지색 네모 상자여야 한다고 다들 믿던 시절에 저게 튀어나왔으니 난리가 났다.
거기서부터 아이팟, 아이폰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다들 아는 그대로고, 2018년에 애플은 미국 상장사 중 처음으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넘긴다.

90일 남았던 회사가 20년 만에 1조 달러가 된 거다. 숫자만 놓고 보면 진짜 말이 안 되는 반전이긴 하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 돈 1억 5천만 달러 하나로 애플이 살아난 건 아니다. 제품 라인 정리하고, 안 팔리는 거 다 쳐내고, 아이맥 만들고, 그 뒤로 20년을 굴러야 했으니까.
다만 그 90일 안에 저 발표가 없었으면 뒤에 올 것들도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여러분 주머니에 있는 아이폰은, 야유받던 그 발표에서 시작된 셈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세요? 게이츠가 애플을 살린 걸까요, 아니면 그냥 서로 필요해서 한 거래였을까요?
